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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길(창세기27장)

김영식 목사의 주일 설교 말씀

by 샤방샤론 2023. 4. 19. 13:45

본문

성도의 길


< 창세기27:27-29>

(창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창12:3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성도의 삶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성도답게 사는 걸까요? 가끔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대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인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라는 나름의 답을 생각하면서 또한번의 고민을 넘어갑니다. 그러나 진짜로 성도로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의문에 본문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모습 속에서 신앙의 굴곡을 잘 해결해 나가는 지혜를 찾으시고, 더 나아가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자 라는 우리의 입버릇이 입버릇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본문의 말씀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정상적인 축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받아야 하는 축복을 야곱이 강탈했기 때문입니다. 강탈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기만해서 받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복은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남는 것이 없는 복입니다. 오히려 형과의 갈등으로 인해서 있는 것도 버리고 도망가야 할 상황입니다. 괜히 복을 받았다가 뒷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더해서 복이라는 놈 때문에 믿음의 가정이 불화를 일으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인다고 이를 가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복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의 모습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이 더 나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삭이 거부가 되었다고 행복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고민과 문제가 결국 우리와 다를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삭은 문제를 해결했고,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고 화평을 이루면 그것만큼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러한 복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을 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해결하지 못한 이러한 문제들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얻어 해결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고, 더 나아가 믿음의 길을 온전히 나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는

1. 믿음을 잃어버리면 문제가 됩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자녀가 없어 고심하는 중에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쌍둥이를 얻었습니다.(창25:21-22) 농사에서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26:12) 양과 소, 그리고 일꾼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게 되었습니다.(26:14) 그리고 그랄왕 아비멜렉과 동맹을 맺어(26:26-33) 주변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이삭에게는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잘나가는 이삭에게도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큰 아들 에서입니다. 에서가 결혼을 위해 데리고 온 여인이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거리였습니다.(26:34-35) 에서의 결혼 문제만 빼면 이삭에게는 승승장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시금 살펴보니 집안에서 보이지 않는 패가 갈려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맡아들 에서를 편애합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합니다. 이 편애가 얼마나 심한지 자신들이 편애하는 아들은 ‘내 아들’(이삭:1-4절, 리브가:8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아들은 ‘너’(이삭:28:1)라고 표현합니다. 똑같은 자식인데, 내가 편애하는 자식만 자식취급하고, 그렇지 않은 자식은 거리를 두겠습니까?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삭이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삭이 복을 받았다 라고 증거하는 26장에서 37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삭의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삭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작을 살펴보면(3-4절) 이삭의 신앙의 상태가 보입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간다고 느낀 이삭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에서를 부릅니다. 그리고 에서에게 별미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고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삭은 족장으로서 장자를 축복하는 당연한 의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부족들의 운명을 가름하는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가득이나 위대한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을 상속해줘야 하는 이삭에게는 반드시 해야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충만한 소산물을 얻고, 대적들을 물리치고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남자 친척들을 불러서 공개적으로 축복합니다. 공개적으로 축복하고 상속하는 것이 정상입니다.(창49장, 50:24-25)

창세기50:24-25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아무리 이삭이 가족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의 형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죽었다고 한다면 에서의 형제이자 쌍둥이인 야곱을 부르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만 불러놓고 축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모르게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삭은 쉽게 관습을 깨뜨리는 것일까? 둘 다 축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는데 왜 그는 에서에게만 축복해 주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삭은 에서가 아닌 야곱이 아브라함 가문의 후계자요,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에서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입니다.

자식 사랑이라면 둘짜가라면 서러울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는 또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위대합니까? 100세의 얻은 아들 이삭까지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아낌없이 드렸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창세기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그 현장에, 아버지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그 현장에, 제물의 당사자인 이삭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이삭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에 서보니까 실패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주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크게 받고, 넘치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믿음에서 떠나 있으면, 그의 믿음의 영광은 과거의 영광일 뿐입니다. 과거의 영광은 아무쓸모가 없습니다.

에스겔18:2-3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에스겔의 말씀과 같이 과거에 믿음이 좋아서, 매일 철야하고, 전도하고, 입신한다 할지라도, 지금 신앙이 좋지 않으면 이삭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그 은혜를 누리며 살려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겠지요? 굳건히 믿음을 지켜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7교회 가운데 두아디라 교회에 하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계시록2:25-29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굳게 잡고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의 길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구분되는 방법이며, 그것이 문제를 만들지 않는 길인 것입니다.

2. 믿음을 지켜면 회복됩니다.

본문에서 사건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흑막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리브가입니다. 만약 리브가가 이삭과 에서의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었으면 형제들간의 칼부림까지는 안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브가만 침묵했으면 이삭은 절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리브가는 본문의 사건으로 인해서 아들 둘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성경에 에서가 야곱이나 리브가와 만나는 장면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편애하였던 야곱까지 생전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가 침묵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5:22-23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리브가의 믿음이 결국에 어그러지고, 잘못된 길로 가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잡았습니다.

창세기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삭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에서에게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계략 아닌 계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야곱에게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물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인한 리브가와 같은 절망적인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켜야 은혜가 회복됩니다.

믿음을 지키심으로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회복이 몸의 회복과 신앙의 회복, 가정의 회복, 사업의 회복, 어떠한 회복이든지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난 주는 복으로 인한 기쁨과 고난의 말씀을 나누었다면 금주는 믿음을 통해서 오는 고나난과 회복에 대해서 말씀을 나눕니다.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지난주나 금주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도 믿음도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믿음의 길, 성도의 길을 가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끝까지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하신 말씀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굳게 잡고 기다리심(계시록2:25)으로 오늘을 사시되,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오늘을 사시고, 내일을 준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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